
1차 아편전쟁의 결과 중국은 이제 아편세상이 됩니다.
아편중독은 관료, 군인,백성을 가리지 않았고
청나라 전국에 걸쳐서 수 많은 중독자를 양산하였죠
아편 전쟁이 일어난 1840년 경에도 이미
어마어마한 물량이 아편이 청나라 전역에 풀렸습니다.
1850년에 이르게 되면 아편 유행은 걷잡을 수 없어
1840년 유통량의 2배를 훨씬 넘게 됩니다
이 시기 사실상 청나라는 국가 해체 단계에 진입합니다.
청나라 인구는 크게 폭증하여 5억을 넘었지만
인구의 1/3 이 유랑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늘어난 인구를 감당 못 한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 졌죠
그나마 있는 관료들은 죄다 아편 중독자로 전락했기에
지방 행정력 또한 벌써 마비된지 오래였습니다.
청나라는 사실상 국가의 행정력, 통제력을 상실하고
군대는 의미가 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왕조에 대한 민심의 이반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반청복명(反晴復明)운동과 같이
청 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중국 역사상의 모든 통일 왕조는 말기에
모두 농민 반란으로 무너졌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파륜궁을 탄압하는 이유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죠
전한이 적미의 난으로
후한이 황건적의 난으로
당나라가 황소의 난으로
원나라가 홍건적의 난으로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청나라도 이제 같은 운명에 처했습니다
아편 전쟁 전 백련교도의 난이 그 조짐을 알렸고
이후에 벌어진 의화단의 난이 그러했습니다


1차 아편 전쟁에 패전 한 청나라에서
왕조의 최후 숨통을 끊을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납니다.
태평천국은 홍수전이란 만년 백수 공시생이
어느 날 계시를 받았다면서 창시한 종교입니다.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다!! 라고 주장하는
미친 소리를 하는 사이비 종교죠
하지만 꿈도 희망도 없는 백성들에게는
이 종교가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그 파급력과 위세가 어느정도 였는가 하면

태평천국은 무려 남경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장강 이남의 전 지역을 장악했을 정도입니다.
기억이 나겠지만 1차 아편 전쟁 때
영국 군이 바로 이 대운하를 끊어서 승리를 했죠
그 대운하가 존재하는 이유는
중국의 경제 중심지인 강남 지역 때문입니다.
북경을 비롯한 북방 여러 지역으로
강남의 물산을 배를 통해 보내는 운송로 역할을 하죠
근데 그 강남 지역이 반란에 넘어간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이전 당나라 왕조, 원나라 왕조도
결정적인 멸망 원인은 모두 강남의 상실이었습니다.
각종 전투에서 전세의 부침이 갈렸지만
마지막엔 강남이 날아간 후 경제적 기반이 붕괴하여
왕조는 더이상 버티지 못 하고 결국 멸망했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강남 지방이 초토화 되었단 것은
이 청나라 왕조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죠
이후 청나라에서 어떤 개혁을 하던지 간에
어떤 발악을 하던지 말던지 뭘 하든지
청나라 왕조는 그 수명을 다 했단 뜻입니다
심지어 태평 천국의 난을 마지막에 진압 한 것도
청나라의 정식 정규군이 아니었습니다.
제 1차 아편 전쟁에서 확인해 보았듯
청나라 군대는 이미 썩을대로 썩어 무기력했죠
팔기군을 비롯해 죄다 쓸모없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태평 천국의 난은 결국 역시 한족 출신 장군들이
각 지역 기반으로 키운 사병 집단을 보내서 진압했죠

이 사병들을 상군, 회군 등이라 당시에 불렀고
훗날 사병들이 북양군벌,남양군벌로 성장하게 되면서
중국 내의 독자적인 군벌 시대를 열게 됩니다
훗날 일어난 청,일 전쟁도 마치 표면적으로는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의 국가 전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청나라 북양군과 일본군의 전쟁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사병 성격의 군벌 집단이
청나라 황실의 지원을 받아 청주력군 대접을 받게 되었고
그중 북양군대가 나서서 일본군과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중국은 이후 군벌들 단위로 각 지역이 쪼개져 분열 된
중국 근대사 대군벌시대로 접어 들게 됩니다
유명한 원세개와 같은 인물도 군벌 출신이죠
그 원세개가 청나라를 결국 멸망 시키게 됩니다.
마치 삼국지에서 황건적의 난이 터지고
이를 각지의 지방 군웅들이 진압 한 뒤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가 열린 것과 같죠
그리고 이 모든 원흉이신 위대한 영국느님은
이런 개막장의 청나라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았고
뭐 좀 더 뜯어 먹을게 없을까 고민 중에 있었습니다

19세기는 대영제국의 시대입니다.
막강한 해군력으로 전 세계를 통제하는 패권국이 되었죠
1860년에 이르면 전 세계는 서구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세계에서 식민지가 안된 지역은 일부 완충지대를 빼면
오직 중국, 한국, 일본 극동의 단 3개국 만 남게 됩니다
영국은 1차 아편전쟁 때 일방적으로 청나라를 쳐 바르며
대 승리를 했지만 그 결과물에 그닥 만족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왜 이렇게 빨리 전쟁을 끝냈냐고
영국 국내에서 비난이 일었을 정도였습니다
반면 아편 단속이 불가능해 진 청나라는
이제는 정신 줄이고 뭐고 걍 전부 다 놔버렸죠
중국은 이제 신토불이 아편을 자체 생산하여
자 국민들에게 마약을 팔아먹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영국과 함께 미국, 프랑스까지
죄다 너도 나도 아편을 팔아먹는 미친 세상입니다.
때문에 영국이 크게 꿀을 빨았던 마약 장사도
이젠 예전처럼 재미를 보는 상황이 아니게 됩니다
영국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더 많은 항구의 개항과
이제는 중국 내륙으로의 진출이 필요했습니다.
영국느님께서 이제 청나라를 상대로 무역을 넘어
사실상 식민지화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영국언론이 발표한 에로호 사건 삽화, 위 그림의 내용은 언플용 프로파간다로 전부 실제한 바 없는 구라입니다)
에로호 사건은 말이 안되는 억지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미 국가 단위로 마약을 팔아먹고 있었고
마약을 단속했단 이유로 전쟁까지 벌인 영국이죠
어차피 개쓰레기 짓을 대놓고 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또 다른 명분 따위가 또 필요할까 싶습니다.
그래도 사람의 정이 야박하게 그런게 아닌가 봅니다
양아치가 삥을 뜯어도 뭘 꼬라보냐? 일루 와바~ 하는
최소한 시비를 거는 형식적인 절차는 있어야 하죠
1856년 10월 청나라 관리들이 에로호라는 선박을
항구에서 나포해 선원들을 체포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위 그림이 바로 그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청나라 관리가 영국 배에 올라 영국 국기를 훼손하고
영국인들을 강제로 잡아 넣는 장면이 보이죠
이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인이 분노해 난리가 납니다
위대한 영국의 배가 청나라에서 탄압을 받았다고
뭔가 익숙한 자유의 가치가 어쩌고 훼손 되었다
이런 주장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다만 문제는 그딴 일이 없었단 것입니다.
일단 해당 선박은 소유자만 영국인으로 등록 되어 있지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 선원들이 탄 선박입니다.
심지어 등록 기간도 만료되 영국 국적도 아니였습니다.
그럼으로 당연히 영국 국기는 배에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아무 관련 없으니 존재한 적 없는 영국 국기를 내리고
배에 타지도 않는 영국인을 체포하는 장면은
애초 물리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에로우호는 광저우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다가 걸렸고
포르투갈 상인들이 해적선으로 에로우를 신고했습니다.
원래는 마카오 관리들이 해당 선박을 체포하고자 했으나
에로우 선박은 곧장 바다로 도주하였죠
청나라 관리는 해적선에 대한 정당한 체포를 위해
다음 항구에 해당 선박 정보를 알립니다
그리고 그 선박이 광저우에 입항 하자 마자
청나라 해관이 나와서 해적 행위로 체포한 것 뿐입이다
말 그대로 절차에 전혀 문제없고
심지어 청나라 관리들은 자신들이 체포한 해적선이
영국과 관련 있단 걸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죠
당장 전쟁을 일으킬 핑계가 뭐든 절실한 상황에서
영국의 '영'자만 어디 조금 묻어도 전부 활용해야 합니다.
그 에로우 선박의 정보를 뒤져 보니까 어라?
영국 소유였다? 라는 내용이 나오네요? 올타쿠나!
영국은 이 사건을 크게 부풀려 여론전을 벌였고
제 2차 아편 전쟁의 빌미로 삼게 됩니다.
이걸 "에로우 사건"이라고 합니다.

(친영 외교정책 즉 영국의 충실한 꼬붕 정책을 추진한 나폴레옹 3세 )
한편 이 시기 프랑스는 나폴레옹 몰락의 교훈을 바탕으로
영국의 충실한 꼬붕이 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서 영국에 협력하고
영국의 양보 얻어 내 프랑스의 국익을 챙기는
매우 영리한 외교 정책을 추진 중이었죠
영국이 기분 나쁘다고 러시아를 크림 반도에서 쥐어 팰 때
프랑스도 무서운 일진 영국 왕 언니를 따라 참전해
러시아를 뚜까 패는데 함께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진 왕언니 영국이 청나라를 뚜까 패려 하니
다시 일진 누나를 따라 참전을 선언합니다

에로우 사건이 터지자 영국군은 더 기다릴 것도 없이
홍콩에 주둔한 함선을 이끌고 광저우로 쳐들어갔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준비하고 있다가 바로 쳐들어간 것이죠
1856년 10월 26일 영국은 광저우를 걍 초토화 시켜 버립니다.
해적선인 에로우호가 나포 된 지 고작 보름만에 벌어진 일이죠
개전 날짜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수사니 진상 규명이니 할 시간조차 안 줬단 뜻입니다
애초에 에로우 호의 정체가 뭔지는 중요한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영국 의회에서는 나중에 또 그놈의 빌어먹을
이른바 "백인의 의무" 논쟁이 또 벌어졌습니다
"아니 영국 국적도 아닌 해적선을 청나라가 체포한 게 어찌 개전의 이유가 되냐?"
지겨운 레파토리입니다.
간단히 우리가 아무리 막장이지만 이건 쫌...아니잖아...
양심에 뭔가 좀 찔린다 뭐 그런 내용이죠
1차 아편전쟁 때 처럼 영국 의회가 일부 반대를 했지만
사실 의회가 뭘 하던 말던 전혀 상관없습니다.
실제로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요
개전 이유에 대한 형식적인 논쟁을 의회에서 하고 있을 때
광저우는 이미 박살났으니까요

1857년 12월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은 상륙하여
광저우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고했습니다.
당시 양광총독인 섭명침은 이를 막고자
다급하게 민병대를 소집했으나 막을 힘이 없었죠
본문 처음에 언급한 태평 천국의 난으로
강남 지방은 진작에 초토화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태평 천국을 진압하기 위해 징발 되어 나간 상태였죠
광저우는 사실상 수비가 불가능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항복을 안 하였고
1858년 1월 양광총독 섬명침은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광저우 지방을 책임지는 청나라 총독은
그렇게 포로가 되어 인도 캘커타에 끌려갔고
인도 현지에 굶어 죽었습니다

광동 일대를 초토화 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1차 아편전쟁때 그랬듯 그대로 북상을 하였습니다.
해안가와 장강하구 일대에서 극심한 방화, 약탈을 했죠
1858년 6월 텐진 앞바다에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당연히 청나라 정부가 놀라 자빠지게 됩니다.
어디서 많이 본 데쟈뷰입니다.
부랴 부랴 청나라 관리를 파견해 화친을 구걸했습니다.
영, 프 연합군은 협상단에 실권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 우리가 장난하는 거처럼 보이니? 라며
경고 차원에서 텐진 항구 주변의 요새들을 박살 내 버립니다

그제서야 큰일 났다 싶은 청나라 정부는
황족 2명을 포함한 전권대신을 재차 파견하게 됩니다.
갑자기 나타난 영, 프 군대의 북경 진입을 막기 위해
청나라가 다급히 항복에 가까운 조약을 체결합니다
텐진 조약입니다.

텐진 조약의 내용은
청나라 항구의 전면 개방
청나라에서 기독교 포교의 전면 허용
북경에 영사관 설치
청나라에서 영국, 프랑스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영국, 프랑스로 송환 시킨다는
치외법권 조항...
말 그대로 멱살을 잡아 영국이 하고 싶었던
그 동안의 모든 요구를 전부 관철 시킵니다
그리고 1년 뒤 정식 비준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그 1년 뒤에 벌어집니다...
1년 뒤인 1859년 6월 비준을 빌미로
영국이 전함을 이끌고 백하를 거슬러 북경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는 당연히 영국이 저지른 명백한 조약 위반입니다.
텐진 조약에서는 항구를 개방하기로 했지
전함을 이끌고 내륙으로 와도 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병력이 탑승한 전함을 이끌고 하천을 따라서
수도인 북경으로 바로 군대를 보내 올라 오다니?
중대한 군사 도발인 동시에 중국 역사상 유래가 없던 일이죠
청나라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 청나라 방어 진영에서
이에 대한 반격 대응을 합니다

근데 이때 가히 기적적인 전투 성과를 보여줍니다.
해안 수비병들은 청나라 군대답지 않게 용감히 싸워서
영국 군함 4척을 격침 시키고 영국 군 500여명을 사상 시키는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엄청난 성과를 냅니다
하지만 청나라 측에서는 똥 줄이 타듭니다
조약의 내용을 들어 니들이 먼저 조약을 어기고
군사 도발을 한거다 라고 구구절절 해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본국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일진이신 왕언니께서 빵셔틀에게 빵 사오라 시켰음
빵 셔틀은 그저 공손히 눈 깔고 사와야죠
다음 쉬는 시간에 사오겠다 핑계를 댄 것도 기분 나쁜 마당에
이게 감히 인상을 구기고 주먹을 드는 시늉을 하네요?
엄연히 난 일진이고 넌 빵셔틀인데 여기서
빵 사라고 돈을 줬니 안 줬니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요
그리하여 영,프 연합은 북경을 함락해
아예 즈려밟아서 청나라에 본 때를 보이기로 결정합니다
1860년 4월 영국군은 함선 173척에 2만명의 병력을
프랑스군은 함선 33척에 6천 3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양국의 대규모 원정군이 광동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다시 북상하며 정해진 루틴처럼
해안지역을 완전 초토화 한 후 텐진을 점령 한 뒤
곧장 북경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당연하게도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각 요새들은
영,프 연합군의 화력과 공세에 전부 초토화 되었습니다

영,프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을 하며
요새들을 차근차근 작살 내며 전진하자 청나라가 다급합니다.
영프 연합군을 저지 하고자 팔기군을 소집하였습니다.
친왕인 승격림심이 방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팔기군과 녹영병 3만 병력을 동원해 방어에 나섭니다
그리고 북경으로 향하는 중요 길목에서
영,프 연합군 1만명과 전투를 벌이니 팔리교 전투입니다.

(팔리교 전투 삽화)
이 전투에서 청나라는 과거 엄청난 명성을 떨친
팔기군 기병 돌격을 감행해 보았지만 뭐 소용 없죠
유럽에서 보병이 방진을 짜서 기병 전력을 박살 낸 게
나폴레옹 시절의 이야기이니 무려 100년 전 전술입니다
팔리교 전투에서 영, 프 방진에 돌격한 청나라 팔기군은
병력 2만 5천을 잃고 무참히 박살이 났습니다.
영, 프랑스 연합군 군은 1천여명 정도 피해를 보았을 뿐이죠
당시 북경 지역 방어를 위해 편성 된
청나라 병력은 8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 프 연합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마치 추풍 낙옆처럼 학살 되고 곧 흩어졌습니다.
죄다 도망갔거든요
당시 청나라는 무기 수준과 기술도 낙후된 상태였지만
태반이 아편에 쩔어서 전투력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군기가 남아 있는 팔기군 조차도
사실상 오랜 기간 귀족 특권층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전투에서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도망치기 바빴죠
팔기군의 명성도 건국 초반에나 있던 것이지
왕조가 200년이 지나니 죄다 귀족이 된 상황입니다.
그저 살아서 도망가면 유복한 삶이 보장된
특권층 팔기군들은 전장에서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군기도 없는 잡병들만 떠밀려서 나가다
일선에서 죄다 학살 당하듯 죽어나가고
아편에 쩔은 지휘관은 뒤에서 보다 튀길 반복할 뿐입니다.
영,프 연합군이 북경에 이르게 됩니다

청나라 함풍제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은
영, 프, 연합군이 북경에 왔단 소식을 듣자
진작에 북쪽 지방에 위치한 열하로 전부 튀어 버립니다.
명분은 이궁으로 가을 사냥을 하러 간다. 되도 않은 이유죠.

북경 성 앞에 도착한 영,프 연합군은 부대를 정비하고
성문 앞에 포대를 정렬 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12일 정오까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즉시 북경을 초토화 시키겠다 최후통첩을 합니다
결국 북경 수비 책임자로 남았던 청나라 공친왕이
성문을 열고 나와 영, 프 연합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청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북경이 함락 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폐허가 된 원명원 흔적)
한편 당시 북경 성 밖에는 청나라 황제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피서지이면서 건륭제 이후 황실의 각종 보물을
고이 소장한 황실 박물관과 같은 궁전이었습니다
이때 원명원에 대한 극심한 약탈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약탈이 끝나자
도망친 황제에게 경고를 주겠단 구실로 불을 질렀죠
화려함을 자랑하던 궁궐, 정원, 박물관은
이때 전부 초토화 되어 사라졌습니다
2차 아편 전쟁에 참전한 영국 프랑스의 군인들이
본국에 돌아와 부자가 된 경우가 그토록 많았다고 합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영, 프 군대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약탈이 자행 되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능하죠
지금도 유럽에서 이때 약탈 된 청나라 물건이
종종 경매에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유럽 시골 농가에서 쓰는 우산 꽂이를 감정해 보니
와! 그게 청나라 보물이더라 하는 경우죠

그렇게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 한 상태에서
도망친 황제를 대신해 공친왕이 항복 조약을 체결합니다.
러시아의 중재로 이뤄진 베이징 조약입니다.
근데 말이 러시아 중재지 그냥 나도 한입만 하며
러시아가 뒤 늦게 숟가락을 얹은 것 뿐이죠
텐진조약 내용에 더하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고
추가로 홍콩 섬 앞 주룽 반도의 할양을 내용으로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
마치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 마냥 숟가락을 얹어
개 꿀빠는 중재를 한 러시아는 연해주를 낼름 먹게 됩니다.
오늘날 동북 지방의 국경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1차 아편 전쟁은 사실 청나라에 있어서
그다지 큰 충격을 준 게 아니었습니다
청나라도 나름 정신 승리가 가능한 영역의 수준에서
나름 선방해 조약이 체결된 전쟁이었죠
하지만 2차 아편 전쟁은 전혀 달랐습니다.
북경 수도가 함락되었거든요
전조 명나라가 수도 북경이 함락되어 멸망 한 이래
북경은 함락 된 적이 없는 도시입니다
중국의 경우 역사상 전통 국가에서 수도의 함락이란
곧 왕조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당장은 황제가 도망을 쳐서 잡히진 않았지만
사실상 왕조의 멸망인 사건이나 다름 없습니다.
본질은 영국, 프랑스가 넓고 넓은 은혜로
그냥 청나라 황실을 너그럽게 살려준 것 뿐입니다
식민지화라는게 차근 차근 소화 시켜 진행해야 하는데
무역 상대국이자 삥 뜯는 국가가 증발해 버리면 안되니까요
영국의 필요에 의해 그냥 존속을 허락한 것이죠
마치 과거 인도의 무굴제국 처럼 말입니다.
물론 청나라가 호구라는 건 진작 들켜서 알고 있었지만
정녕 이 정도의 씹호구인지는 몰랐습니다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 모두가 달려 들어
뜯어 먹는 반식민지화의 처지로 추락합니다
과거 해안 항구에서의 이뤄진 무역을 넘어
서구 열강은 경쟁적으로 내륙으로 진출해 이권을 챙깁니다.
광산, 철도, 각종 자원 등등 중국 대륙의 각종 이권을
열강이 하이에나처럼 뜯어 먹고 쟁탈하는 시대가 열리죠
이후 청나라 역사에서 서태후가 나쁜년이네
그래도 동도서기, 변법자강 운동을 했네 등등 나옵니다
근데 전부 무슨 의미인가 싶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청나라의 국가 통치력이란 건
사실상 형식만 남아 점차 와해되 해체 되기 시작합니다.
전국의 지역은 가족 단위, 마을 단위 자경단들과
또는 유력 군벌들의 통치로 유지되는 상태로 바뀝니다
사실상 청나라라는 국가는 아편 전쟁 이후에는
그저 명분과 이름으로 유지되는 중이었죠
당시 급작스럽게 찾아온 국가의 해체 상황에서
청나라 왕조를 대체할 다른 대안이 없을 뿐입니다.
그저 청나라 왕조라는 관성으로 일단 이어가는
빈 껍데기 국가로 천천히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개혁을 해도 북경 궁궐에서나 통하는 말이고
실상은 전국적으로 확대할 능력도 힘도 없었습니다
신해 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선포 되었을 때
무슨 엄청난 무력으로 청나라와 싸워 이겨서
새로운 국가를 세운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국가의 명분과 대안을 제시해 주자
이미 전국의 통제력을 장악한 지역 군벌들이
청나라가 아닌 중화민국의 손을 들어줬죠
북경을 통제하던 북양 군벌 수장인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설득에 응답하여
오늘 부터 청나라 끝! 선언하자
청나라는 정말 단 하루만에 멸망했습니다.
또한 모든 전쟁의 원인이 된 아편은
이후 이어지는 중국 역사를 완전 뒤틀어 버렸습니다.
마약인 아편은 중국 땅에서 공식화가 됩니다.
중국에서 아편 중독은 그야말로 일상이 되었고
향후 100년 간 중국을 병들게 하며
뿌리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2차 대전 기간 일본에게 전쟁 내내 고전하고
국공내전 기간 국민당이 패전한 이유를 두고도
이 아편에서 원인을 찾기도 합니다
1940년 대까지도 아편은 중국에 너무 만연하여
국민당 장군들과, 군인들 모두 아편에 쩔어서
태반이 중독자로 지냈고 군 기강은 항상 엉망이었죠
중국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아편을 비롯한 마약을 전면 금지한다
중국 내 강력한 아편 근절 조치를 선언하기 전까지
중국은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죄다 마약에 쩔은 세상에서 생활하고 살았습니다.

동아병부(東亞病夫)
아시아의 병X 는 중국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현대 중국에서 마약 관련 범죄는
무조건 사형입니다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중대 범죄거든요
과거 한국인 마약 사범이 대사관에 통보도 없이
사형 집행되어 외교분쟁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향이 있습니다.
제 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동아시아에서 장장 2천년 간 이뤄졌던
중국 중심의 중화 질서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일본입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해외 정보를 입수한
당시 일본도 아편 전쟁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청나라 북경이 함락되었단 충격적인 사건은
일본에게 엄청난 공포로 인식되었죠
훗날 미국이 일본에 왔을 때 전투 없이
바로 개항한 이유도 이미 그 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 중심의 중화 세상은
이제 완전 끝났다고 판단하게 합니다
이런 정보를 가장 빠르게 입수한 지역은
규수 최남단의 사쓰마 번입니다.
지리적 위치는 보면 알듯
최남단에서 무역을 통해 먹고 살았던 지역입니다.
막부 보다 더 자세한 서양의 정보를 얻었죠
때문에 아편전쟁의 충격적인 소식을 알게 되자
일본에서 큰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가져 옵니다.
중국이 끝난 세상에서 더 강력한 서양을 따라 한다는
새로운 사상을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막부는 이런 변화를 이끌 힘이 없기에
과거의 막부를 끝내고 밀어내고자 했습니다.
이들 사스마번, 조슈번 등 최남단 지역의 인사들을
주축으로 막부 타도 운동을 일으켰으니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한국의 경우 정상적인 경우라면
일본 보다 청나라의 정보에 더 밝은게 정상입니다.
일본은 청나라와 무역을 못 했지만
조선은 매년 조공 사절을 보냈고
정식 외교 사절이 정기적으로 현지에 갔거든요
청나라와 공식적으로 왕래를 지속하는
중요 국가였기에 정보를 직접 취합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일본 보다 정보력이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경우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얻는
간접 정보임에도 디테일한 정보를 모두 받아 본 반면
한국의 경우 청나라에 조선이 가서 얻는
직접 정보를 받았음에도 정보가 통제 됩니다.
세도정치의 시대입니다
청나라에 간 노론 신하들이 그나마 얻은 정보를
모두 통제하고 왜곡하여 본국에 가져왔습니다
보수 기득권이 된 이들은 변화를 두려워 하였기에
세도가문에서는 북경의 함락이란 큰 사건조차도
그저 별개 아니라는 식으로 축소 보고를 했죠
정사를 팽개친 강화 도령 철종 임금 조차도
무슨 북경이 함락 되었는 소문이 있는데
이게 별개 아니라니 믿을 수 없습니다.
왕조차 세도 가문 신하들의 말에
이게 도무지 말이 안되는 것이라 여겼죠
철종이 따로 측근 왕족을 파견해
진짜 진상을 알아오라 밀명을 내릴 정도로
당시 조선의 사정은 개판이었습니다
뒤늦게 대원군이 집권을 하였지만
청나라가 망했다는 공포는 반작용으로
체제 수호를 위한 적극적인 쇄국으로 이어졌죠
이는 대원군이 집권 한 후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막아내며
자체적으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겠다는
쇄국척화와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존재는
이제 천하의 중심도 아니고 강력한 국가도 아닙니다.
장장 2천 년을 내려온 동아시아의 질서
전통적인 조공 질서가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죠
청나라의 조공 국이던 베트남이 이탈했고
이어서 조선도 차례로 이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양식의 근대 국제법 질서가 이를 대체하여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로 자리 잡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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