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촉,오 삼국을 통일 시킨 서진 왕조가 멸망 한
'영가의 난' 그리고 이어진 혼란의 오호 16국 시대
북방의 수 많은 이민족이 침략해 와
도시는 모두 초토화 되고 지상에 지옥이 펼쳐졌습니다
사방에서 전쟁과 살육이 끊임 없었기에
사람들은 가족들과 흩어졌으며 고향을 떠나 유랑을 다녔지요
이때 남겨진 서진의 유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여 떠돌아 다녔습니다
이를 걸활군'乞活軍' 이라 하였죠
'빌어먹어 사는 군대' 이름에서 바로 알 듯
말이 군대지 그냥 무장한 거지 떼입니다.
염량(冉良)은 서진 사람으로
부친은 하내 지방의 서진 수비군 장군이었습니다
흉노족의 침공이 있던 때 전조 석륵의 공격을 받아
하내에서 아버지 염륭(冉隆)이 전사했고
이 걸활군에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했죠
어려서 이민족과 싸우며 성장을 했고
전투를 생활화 한 탓에 싸움에 능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이민족에게 패배 하여
포로로 잡히게 되었으니 그의 나이 12살 때의 일입니다.
소년 염량을 사로잡은 오랑케 군대는
바로 아버지를 죽인 석륵의 군대였습니다.
석륵은 당시 흉노족이 세운 전조(前趙)의 장군이었죠
이후 12살에 불과한 소년 장군 염량은 석륵의 밑에서
동진(東晉)의 군대를 격파하는 수 많은 전공을 세웁니다
사실 아이러니죠
자신의 아버지는 사마씨 진(晉)왕조의 장군이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전조의 석륵입니다.
하지만 아들인 염량은 석륵의 밑에 들어가 부하가 되고
아버지의 나라 진나라를 격파하는 선봉이 된 것입니다
이 당시는 무슨 민족이니, 국가 개념이니 하는
그런 인식이 있던 시절이 아니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아주 어릴 때 일이고
그저 거지처럼 유랑 생활을 어렵게 했을 뿐이죠
너무 힘든 성장기를 거친 소년의 세상에 나타나
그가 가진 능력을 알아 준 것이 석륵이었습니다
이 난세에 목숨을 부지하여 이어가게 해주고
재능을 알아봐 준 은인에게 충성을 다 한 것이죠
염량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알아 본
석륵의 일족 석호에 의하여
소년 염량은 양자로 거두어 지게 됩니다
이름도 개명하여 염량을 석첨(石瞻)으로 바꾸죠
그리고 그가 양자로 들어간 석씨 가문은
동양인이 아닌 갈족(羯族)입니다
바로 서역에서 넘어 온 유목민이죠

서흉노가 중앙아시아 지방을 정복했을 때
흉노의 밑으로 들어 온 서역의 이민족으로 추정됩니다.
코카서스 인종으로 백인입니다.


(후조 석륵 삼국지 일러스트)

(대충 이런 느낌?)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갈족의 생김새를 묘사 하길
"코가 크고 눈이 깊으며 털이 많다"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다른 종교가 있고
호천(胡天)이란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죠
이들의 종교가 중동 지방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게 아닌가 추정합니다
'호천'을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로 보는 것이죠
일부에서는 이 종교가 조로아스터교고 아니라
유대교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족은 지금의 이스라엘 지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온 이민족이다 그런 가설인데
이 주장이 맞다면 유대인 계열이란 말이고
이들의 신 '호천'은 성경의 야훼란 주장이 됩니다.
이 갈족은 상당히 호전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전투에 매우 능하고 특히 잔인하였기에
흉노족이 서진 왕조를 멸망 시킬 때 공을 세웠습니다.
중원 지역의 진나라 군현을 정벌하고 다닐 때
석륵과 갈족은 언제나 최선봉에서 활약을 했지요
이들의 흉폭함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족 여성 10여 만명을 붙잡아 데리고 다니며 밤에는 겁탈 하고 낮에는 삶아서 잡아먹었다
때문에 이들은 한족 여성을 두고 "양각양(兩脚羊)두 다리를 가진 양"이라 불렀다-
이 기록은 동진의 '진양추' 송나라 때 '책부원귀'에 나온다
하지만 실제 해당 서적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대중 이야기가 점점 보태지며 만들어진 설화 같습니다.
대신 비숫 한 기록으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팔왕지란 때 하간왕 사마옹의 장군 장방은 백성 1만여명을 데려가 식량이 없으면 이들을 죽여 말고기와 함께 잡아 먹었다"
"영가의 난 때 갈족 석륵이 진나라 군대 10만 명을 추격 섬멸 할 때 진나라 포로와 시신을 불태워서 먹었다"
또한 석씨 후조 왕조의 태자 석수도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였습니다.
이쁜 궁녀가 있으면 그 목을 잘라 얼굴을 감상하고
그 신체는 삶아서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갈족의 후조 왕조가 궁녀 10만명을 징발 해
업 성에 잡아 두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모용씨와의 전투 과정에 업성이 장기간 포위가 되자
이들 궁녀들은 한족 수비군들에게 모두 잡아 먹혔죠
성이 함락되었을 때 10만 궁녀는 모두 먹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당시 활약한 갈족이
특히 좀 포악하고 잔인하긴 했지만
그 당시 벌어진 각종 식인의 참상과 잔인함 등은
그게 한족, 갈족이냐를 굳이 따질 상황이 아닌거죠...
그냥 이 시대가 생지옥 그 자체였던 것 뿐입니다.
다시 돌아 염량 즉 석첨의 이야기로 와봅니다
석첨은 석호의 양 아들이 되어 석씨 일족이 되었고
석륵이 후조 왕조를 건국 할 때 선봉에서 항상 활약했습니다.
석호의 가장 아끼는 장수였죠 하지만 전사를 하게 됩니다.
이때 남겨진 석첨의 아들이 고작 6살이었으니
바로 본문의 주인공 염민입니다
당연히 석씨의 일족으로 석민이란 이름을 썼습니다
석호는 석첨이 일찍 죽은 것을 너무 안타까워 했습니다.
때문에 석첨의 아들인 양손자 석민(염민)을 아끼어
진중에서 본인이 직접 거둬서 키워주었죠
때문에 석민은 석호의 자식들과 가족같이 지내며
어려서 함께 성장하며 생활했습니다


석민(염민)은 아버지를 닮아 군재(軍才)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석호를 따라 다니며 전쟁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매일 전쟁을 하며 수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닭보다 일찍 일어나 전투를 했고 싸우다 닭보다 늦게 잠에 들었다"
이 시절 석민의 모습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말 그대로 성장 과정과 청춘 시절을
오직 석씨 일가의 천하 통일에 모두 바쳤던 것이죠
그렇게 양할아버지 석호는 후조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석민(염민)은 갈족과 같은 이민족 백인이 아닌
순수 한족이었지만 스스로를 한족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죠
아버지 시절 부터 갈족 부락에서 자랐고
석씨 형제들과 함께 어려서 성장했으며
석호의 손자로 또 석씨 성을 가진 채로
모든 인생을 살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석호가 죽었습니다

당시 석민(염민)은 관중의 반란을 진압하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돌아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황제 석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하내의 석준에게 달려가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합니다
석호의 아들로 어려서 석민(염민)과 함께 자라고
함께 전쟁에서 싸워 온 형제인 석준입니다
당시 둘이 반정을 결심하자
석준은 석민(염민)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길 합니다
"우리 한번 잘해 보자 이번 거사가 성공해 내가 황제가 되면 널 태자로 삼겠다"

물론 당시에 정변의 성공 여부를
그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던 상황입니다.
석준은 함께 하는 석민에게
그냥 "잘해 보자" 라는 뜻으로 파이팅 하며 한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진 빈말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걸 들은 석민이
"진짜로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는 것에 있지요
석준이 반정에 성공하여 황제로 즉위 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자 자리는 석민(염민)이 아니라
석준의 조카인 석연이 차지 하게 됩니다.
이때 석연이 무슨 석준의 숨겨 둔 아들이라서
어쩔 수 없이 태자가 된게 아닙니다.
그저 같은 석씨로 가족 중에 찾아서 태자로 세운거죠
그도 그런 것이 석민(염민)이 아무리 석씨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인종도 다르고 종족도 다른 그냥 양자거든요
당연히 석민이 태자 자리를 사양 할거라 믿었죠
거병 당시에 했던 말은 그냥 빈말로 던진 말이었는데
그대로 믿고 석민이 진짜 태자가 될 생각을
감히 했을거라고 상상 못했습니다.
어찌 하였던 큰 공적을 세웠음으로
석민(염민)에게 군권과 작위를 주며 달래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또 큰 우환으로 작용해
황제 석준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황제는 석민(염민)이 불만이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큰 불만을 품고 있는 석민에게
막상 군 지휘권을 주어서 군대를 관리 시킨게 아차! 싶죠
군사력과 권력을 쥔 석민을 보며
이제는 언제 반역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석준은 친본가의 황족만 모아서 가족 회의를 열었습니다
아무래도 석민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주제였습니다.
본가인 의양왕 석감, 낙평왕 석포, 여양왕 석곤 등과
석호의 황후였던 정태후만 모여 석민 문제를 논했습니다
신하를 처분 하는 문제를 조정의 신하들과 논의 안하고
가족들만 모여서 회의를 했단 것 자체만 보아도
당시 석민의 신분이 특별했단 뜻입니다.
어려서 함께 자라고 생활해 온 석민(염민)에 대한 감정과
여러 미안함이 있었단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 당시 정태후(석호의 황후)는
그동안 극노(석민의 자)의 공로가 이토록 큰데
너희들이 왜 죽이려 하냐고 꾸짖습니다.
그 아이가 잘 못을 했으면 꾸짖어서 고치게 하면 되지
죽이려고 까지 하느냐!" 며 안된다고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회의 결과는 황제 석준의 뜻 대로
결국 석민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가족 회의가 끝났는가 싶었는데...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의양왕 석감이
다른 마음을 품고 뒷통수를 쳐버립니다.
회의가 끝나자 바로 석민에게 쪼르르 달려가
너를 죽이기로 했다고 그 정황을 상세하게 꼰지릅니다.

황제인 석준을 죽이고 대신 자신을 황제로 옹립해 달라 이거죠
석민(염민)은 결국 참고 참은게 폭발해 버립니다.
같은 갈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같은 석씨임에도 무시를 당한 것을 참았습니다
근데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까지 하다니...
이건...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죠
그동안의 그냥 잊고 모른 채하고 지내고
또 아프면서 계속 참았던 상처가 터져 버립니다.

석민은 곧장 병력을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황제인 석준과 그 일가를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그때 가족 회의에서 석민의 목숨을 살려줘야 한다고
석민을 변호한 할머니 정태후 역시 가차없이 죽여 버리죠
황제 석준이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죽임을 당할 때
병사에게 물어봅니다 "누가 날 죽이라고 하였느냐"
그때 병사 한명이
"의양왕(석감)께서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 라고 대답하자
죽어가는 석준이 실소를 하며 말합니다
"나 까지도 이렇게 당했는데 하물며 석감 같은 멍청이는 얼마나 버틸 거 같으냐..."
물론 의양왕 석감은 그런 우려와 달리
마냥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큰 그림을 그리며 나름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우선 석민을 무덕왕에 봉하여 작위를 주고
그의 공적을 크게 치하 해 준 다음
방심한 틈에 그를 궁궐로 불러 들여서
다른 갈족 장군으로 하여금 매복해 두었다 제거할 계획이었죠
용양장군 손복도 등에게 3천명의 병력으로
성에 매복하도록 지시한 후 석민을 궁궐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석민이 성문 앞에 도착하자 기습을 명령 하였죠.
과거 하진이 십상시에게 당할 때 허망하게 당했던 계책입니다.
동탁도 왕윤에게 속아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죠
사실 석감은 나름의 훌륭한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쳐 맞기 전 까진 몰랐을 뿐이죠

분명 호위병 소수 병력만 이끌고 온 석민입니다.
그를 기습해 죽이려고 매복한 병사는 3천 명에 달했죠
근데 석민은 갑작스런 기습에 죽기는 커녕??
용맹무쌍하게 모든 공격을 버텨냅니다 ?????
그리고 거꾸로 무쌍을 찍으며 전진하니
이들 매복한 병력을 모두 격파해 버렸습니다.
!!!!!!
이게 뭔가 일이 틀어지고 큰일 났다 싶죠
석감이 다급하게 석민에게 문을 열어주며
다시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손복도가 반역을 저질렀다"
저 괴물 같은 석민이 나타났는데 일단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석민을 절대 죽이려 한게 아니라
갈족 장군 손복도가 꾸민 짓이다 외칩니다.
혼자서 반역해 저지른거라 뒤집어 씌워버린 것이죠.
석민은 "아...네... 그러세요?" 하며
손복도를 죽여 버린 후 궁궐로 들어와 장악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반역자를 잡는다며
무기를 든 갈족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순식간에 수도가 아수라장이 되고
갈족들은 무장 해제를 당하게 됩니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립니다.
난을 평정했으니 성문을 다시 개방하겠다.
"나를 따를 사람은 업성에 남도록 하고 나를 안 따를 사람은 성을 떠나도록 하라"
그런데 그때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직전까지 갈족 병사를 잡는다며 살육이 벌어지니
크게 놀랐던 갈족 사람들입니다,
성 문이 열리자 저기로 빠져나가는 것만이 오직 살 길이라
생각하며 앞 다투어 성문을 나갔습니다.
반대로 성 밖에 있던 한족 사람들은
또 뭔가 큰 변고가 터진 것을 알게 되고 무서워 했죠
지금 변란이 터졌으니 성 밖에 있으면
행여 전투 중에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여
보다 안전한 업성으로 들어 오고자 난리가 납니다.
석민(염민)이 나를 따를 자는 성안으로 오고
나를 안따를 자는 성밖으로 나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근데 가만히 보니까 극명하게 모습이 갈려진 것입니다.
갈족은 전부 성 밖으로 나가려 아우성이고
한족은 전부 성 안으로 들어 오려 아우성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 보던 석민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나는 갈족이 아닌 한족이었구나..."
스스로를 석씨이자 갈족의 구성원이라 여겼습니다.
양할아버지를 따라 갈족인 석씨를 따라 디녔고
그는 후조 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죠
거기에 자신의 청춘과 일 평생을 다 바쳐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족이 아닌 한족이라는 이유로
큰 공적에도 불구하고 석씨 가족에게 버림 받았죠
그리고 갈족들은 자신을 버리며 떠나고
한족들은 자신을 찾아 오는 것을 지켜보게 된 것입니다.
....
....
....
결국 석민은 후조 전국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살호령(殺胡令)"
무시무시하게도 후조 왕조 전국에 있는
모든 갈족 인종을 전부 죽여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사건으로
특정 인종에 대한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학살입니다.
제노사이드의 첫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조나라 사람으로 호인胡人을 죽이면 문관은 3등급을 올리고 무관은 아문(부사관)으로 임명하겠다"
이제 말 그대로 대대적인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도인 업성 인근에서만 갈족 20만여명 이상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참히 학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조 전역에서 이민족 호인(胡人)이면
닥치는대로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일부 갈족 관리는 학살을 피했습니다
양주 자사인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하는 갈족 관리는
본인이 갈족임에도 살아 남기 위해서
동족인 갈족을 잡아 죽여서 대신했죠
고위 관료 조차 그런 방식으로 목숨을 건졌으니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짐작이 되죠
기록에 따르면 죽임의 대상은
단지 "코가 크거나 수염이 많다" 라는 이유로도
닥치는대로 붙잡혀 학살이 자행되었다 합니다
이 말은 즉 이 당시 학살의 정도가 갈족인지 여부가
사실 중요하지 않은 단계까지 이르렀단 것이죠
북중국 지역의 한족은 이민족이 침략한 이래
각종 침략과 살육에 시달리며 한을 품어왔습니다.
그런 원한이 깊은 가운데 후조의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이민족 대학살을 명령한 것이죠
마치 그동안의 한을 풀어 버리겠단 심정으로
이민족 에 대한 학살과 광기를 벌인 것입니다

그럼 황제인 석감은 어찌 되었을까요
동족인 갈족이 닥치는대로 학살 되는 와중에
황제 석감이라고 혼자 멀쩡 할 수가 없죠
석민에 의해 누각에 유폐되어 감금되었고
음식을 밧줄로 올려서 겨우 먹는 지경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 얼마안가 끌려 나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처형 될 때 당연한 수순으로
석호의 형제, 자식을 비롯한 석씨 수 많은 황족들은
모조리 붙잡혀 도륙되었습니다
업성에서 석씨 일족의 씨가 말려졌습니다
그라고 석민은 석(石)씨를 버리고
과거 할아버지의 성이자 한족의 성씨인
염(冉)씨로 돌아가죠
염민이라 본인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후조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워
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으니
이때 염민이 세운 나라를 염위(冉魏)라고 합니다.
염민은 즉위 후 거의 매일을 군대를 이끌고
주변의 이민족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살호령으로 이민족에 대한 대대적 학살을 했고
그 원한으로 살겠다며 이민족들이 뭉쳤거든요
이때 염민은 가히 전신(戰神)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한족 기병 3천으로 흉노군을 급습하여 수급 3만을 베었고
다시 5천 기병으로 흉노군 7만을 격파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후조의 잔당과 이민족들이 연합하여
30만 대군으로 염민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염민은 남쪽에 세워진 같은 동족의 나라
한족 동진 왕조에 구원병을 청하게 됩니다
"함께 오랑케를 몰아내고 중원을 수복하자"
근데 동진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염위의 요청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염위는 바로 얼마 전까지 후조의 장군으로
동진의 사령관 저부가 이끄는 3만 북벌군을
무참히 격파해 버린게 바로 염민이었습니다
그 당시 동진이 중원회복을 위해 북벌을 시작하자
화북의 한족 유민 20만이 동진에 귀부 하였죠
근데 염민이 동진의 북벌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동진에 항복한 20만 유민들은 그대로 학살되었습니다
이런 과거의 '죄?'를 가진 염민이
오랑케를 함께 몰아내자라니요? 말이 됨?
공식적으로 모시던 황제를 죽이고 찬탈 한 역적입니다
또 무고한 백성을 대량 학살하는 짓까지 벌인 후
원군을 청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히죠
동진 입장에선 그냥 매국노에 역적에 불과합니다
동진은 염위의 영토인 합비성을 함락하는 것으로
염위가 보낸 요청에 대한 답변을 대신 했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이민족을 모두 상대하게 된 염민은...
매우 불리한 전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근데 또 전신(戰神)의 위엄을 보입니다.
이민족 연합군 30만을 창정에서 모조리 격파해 버립니다.

창정대첩이라 불리워집니다.
전투에서는 가히 적수가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죠
이후에도 덤비는 이민족은 족족 싸워서
염민은 전부 격파하고 승리했습니다.
엄청난 전공이자 엄청난 군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역시상 존재한 염민에 비하면
삼국지에 나오는 소설 여포는 그냥 귀여운 수준입니다.
그리고 또한 염민은 여포처럼 그저 싸움에 능한 장군이지
결코 황제가 아님을 증명하게 되죠
일단 황제가 수도를 비우고 거의 매일 군대를 이끌고
여기 저기를 돌며 싸우니 통치가 제대로 될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오랑케는 과거의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고
한족도 과거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당시 말도 안되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수백만에 달하는 이민족들은 강제로 이주를 당하였고
당연히? 이동하는 길에 공격과 살육을 당해 학살 되었죠
도착한 백성은 2할~3할 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한족은 멀쩡한가 한족들에게도 니들 고향으로 가라고
또 강제로 이주를 시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원한을 가진 이민족이 한족을 공격해
다시 또 태반이 학살을 당하며 흩어지게 됩니다
멀쩡한 나라의 인구가 삽시간에 증발한 것이죠
즉위 1년만의 일입니다.
결국 낙주, 예주, 서주, 형주 등 7개주의 자사가
동진으로 투항해 버립니다.
염위는 수도 업성 주변만 남기고
사실상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다 수도 업성의 양식이 다 떨어졌고
군사 1만을 이끌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옵니다.
황제가 거지처럼 유랑하게 되었으니
어라? 어디서 많이 보던 데쟈뷰입니다.
마치 갈족을 만나기 전 걸활군(乞活軍)이라는
유랑군을 이끌던 아버지 염량의 꼴이 되어 버립니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거지꼴의 고작 1만의 보병 병력만 가진
거지 황제 염민이 되어 버린 것이죠
그럼에도 염민은 얼만 안 남은 병력만 가지고도
과거 고구려의 수도까지 박살 낸
동북아에서 당시 가장 강력했던 국가
전연의 모용 선비와 또 붙어서 승리합니다. ????
그냥 소수 병력과 교전한게 아니라
염위를 멸망 시키겠다 쳐 들어 온 전연의 대군입니다.
전연 최고의 명장 모용각의 14만 대군을 상대로
10번 싸워 10번을 모두 격파하는 위엄을 또 보여줍니다.

싸우면 불패의 전공을 세우니 레알 군신이죠
사실 그 무력과 군사적 재능만 놓고 보면
중국사에서 항우에 비견 될 수준입니다.
전연의 모용준이 염민에게 호통을 칩니다.
"넌 석씨의 노예에 불과한데 어찌 황제를 참칭하느냐" 욕하죠
염민이 화답합니다.
"너 같이 금수만도 못한 오랑케도 황제를 참칭 하는데 어르신은 중원의 대영웅으로 못 할게 무어냐"
결국 모용각은 아예 숫자로 압살 하고자 합니다
기병대를 철삭으로 서로 연결하여 방진으로 조여서
3겹으로 에워싸 포위해 공격하였죠
그 결과 가까스로 염민의 보병을 겨우 격파를 합니다
그럼에도 염민은 수백명의 보병을 이끌고
기여히 포위망을 부시고 나와 후퇴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하필 염민의 준마 '주룡마'가 돌연 죽어버림으로써
결국 염민은 모용씨 전연군에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포로가 된 염민은 전연의 수도 '용성' 으로
지금의 요서지방 조양시로 끌려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죽임을 당하자
요서 지방에 장장 7개월의 가뭄이 들었고
그가 죽은 산의 주변 7리 반경의 산천초목이
전부 말라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모용준이 염민은 군신(軍神)인데
죽음을 당하여 저리 된 거라 여기고
그가 죽은 산에서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염민에게 '무도천왕'이란 존호를 올리니
그제서야 가뭄이 멈췄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한족 유민들이 만들어낸 신화겠죠

지금도 염민은 한족의 대 영웅이라 칭송을 받고
현지에는 위와 같이 석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인종학살을 자행한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인물에게
너무 과분한 대접이 아닌가 싶지만
시대 자체가 워낙 잔혹하던 시절의 일이죠
만약 우리가 고려시대 40년 간 한반도를 유린한
몽골족을 누군가 나와서 염민처럼 전부 격파 했다면
이를 어찌 평가를 했을지 생각해 보면
차마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 봅니다.
역사에는 다양한 분기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어떤 일은
매우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작 말 한마디에서 시작 된 작은 균열입니다.
석준이 염민에게 처음 던진 말은 그냥 빈말이었죠
하지만 그 말은 스노우볼이 되어
말을 한 당사자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석씨 황실을 멸족 시켰고 후조를 멸망 시켰으며
나아가 중국 땅에 넘어 온 유목민 갈족
전체 인종이 아예 멸종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갈족은 중국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집니다.
5호16국 시절의 염민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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