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글

한국 성씨의 유래

역이기 2025. 8. 4. 03:06

 

 

인류가 최초로 무리 지어 살았던 초창기 군집사회에서는

일부 일처제가 아닌 군혼(집단 혼인)이란 것을 했습니다

혈기 넘치는 남자 여자가 동굴 속에 모여 살면서

본능에 따라 부비 부비하고 번식을 하여 무리를 늘렸지요

 

그렇게 늘어난 구성원은 10개월이 지나 나온 관계로

지금처럼 배란 주기를 알던 때도 아니고

카톡으로 원나잇한 놈들에게 일일이 물어 볼 수도 없기에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여부는 오직 낳는 과정을 통해

눈으로 확인 되는 모친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게 됩니다

 

때문에 인류 사회의 초창기 모든 집단은 모계 사회고 

인류 최초 집단은 모계 씨족 사회가 기본 단위가 됩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이 모계 사회와 모권 사회는 다릅니다 

혈통이 모계라는 것이지 여성 권력사회 그딴게 아닙니다

 

그렇게 최초 모계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존재의 증거로

그 혈통이 어느 집단인지 밝히며 사용한 것을

 

성(姓) 이라 부릅니다.

 

모계 혈통을 중심으로 인구가 늘어난 인류 집단은

농경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정착을 하게 되죠

이후 농경의 기반이 되는 땅을 중심으로 

중요한 재산권인 땅을 차지한 남성에 의해

문명 단계인 부계 사회 혈통이 생성 됩니다.

 

땅의 주인인 남자는 장차 소유하고 있는

땅을 자신의 자손들에게 상속해야 함으로

자기와 무관한 외간 다른 남자의 혈통이 개입되면 

소중한 재산이 타인의 혈통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안 그럼 죽 쒀서 개주는 것이 되거든요

 

이는 인류가 재산권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결혼 제도를 정착 시키고

부계중심으로 일부 일처제 또는 정조문화를 만들어

타 혈통을 배제하는 윤리 문화를 만든 이유입니다

 

그렇게 부계의 직위와 지역 토지를 중심으로

그 자신이 어떤 지역의 집단인지  밝힌 것을 

 

씨(氏)이라고 부릅니다.

 

 

 

동아시아 초기 문명인 춘추 전국시대만 하여도 

사람들은 성(姓)과 씨(氏)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유명한 낚시의 달인 강태공 이야기에 잘 나와 있죠

제나라 시조인 이분의 성을 강(姜)상 이라고도 부르고

씨인 여(呂)상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본래 모계인 강의 성을 가졌는데

'여' 땅을 받은 후 여씨를 얻었다 합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이런 관행도 점차 변했고

모계의 성(姓)과 부계의 씨(氏)가 합쳐서

결국은 "성씨"로 합쳐서 사용하게 되었죠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를 지나게 되면

성씨에서 모계 혈통의 의미도 점차 사라지고

이제 오직 부계의 혈통만을 의미하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의 개념이 확립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중요한 것은

모계의 성과 부계의 성을 구분해 사용한 목적입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존재가

자신의 혈통을 증명해야 할 정도로 신분이 높거나

혈통을 구분해 상속해야 할 정도로 

가지고 있는 재산이 많은 존재라는 것이죠

 

고대 국가에서 성씨라는 것이 오직 

왕과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존귀한 존재가 아닌 미천한 우리들은

그저 돌쇠 먹쇠 개똥이 등으로 불려질 뿐입니다.

 

동아시아 중심부 문명에서 발생한 현상이 이러하니

한반도의 성씨도 사실상 비슷한 과정을 통해

비슷한 개념으로 수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지만 

 

일단 그 기록이 매우 매우 부족합니다 

 

 

 

 

 

 

단군 신화에 나오는 하늘족, 곰족, 호랑이족의

존재처럼 아마도 부족 단위로 씨족을 구분 했겠죠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쑥과 마늘 먹고 사람이 된 웅녀와 결혼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나옵니다. 

 

어라? 아버지가 환웅인데 할아버지는 환인이네요?

그럼 단군의 성이 환(桓)씨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환인이라는 이름이 불교용어입니다. 

불교 최고 호법신 제석천을 지칭 하고

인도의 범어를 음차해 한자로 석제환인이라 합니다. 

환인은 바로 이 석제환인을 말하는 것이죠 

불교 전래는 삼국시대인데 단군 신화에 왜?

네 단군신화를 저술한 일연이 불교 승려거든요.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대가 고려시대입니다

단군 신화를 당시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일연이 불교 용어로 설명한 기록입니다

 

이후 등장한 고구려와 백제는 어떨까요 

 

 

(드라마 주몽(정확히는 추모왕)이 유명합니다.) 

 

고려 시대 만들어 진 역사 책 삼국 사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시조 이야기를 전합니다 

 

고구려를 건국 한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라 합니다 

그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자신의 성을 "고"씨로 정했다고 합니다. 

 

백제의 건국 시조는 온조입니다. 

주몽의 아들로 형 비류와 오손 도손 잘 살았는데 

어느날 부여에서 무서운 일진 형아 유리가 왔고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 했죠 

이후 "부여"씨를 성으로 썼습니다. 

 

어라? 또 이상하죠.

 

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 해씨인데 스스로 고씨라 했고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니 고씨여야 하는데 부여씨라네요?

 

고구려와 백제의 혈통과 성씨가 성립하는 과정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었단 뜻입니다. 

 

이전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한서의 기록에서는

고구려 왕의 성씨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고구려 5부제 백제 5부제로 알듯 

집단 씨족 간의 명칭과 구분은 존재했지만

개별 혈통인 왕족의 성씨는 

아직 없었을 가능성도 있단 뜻이죠 

 

실제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 성씨가 확인되는 것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절에 이르러서이고 

백제는 근초고왕 시절에 이르러서입니다.

금석문과 중국 사서로 교차 검증이 가능한 시기입니다

 

 

그 밖에 고구려에는 20여개의 성씨가 

백제에는 대성 8족이란 성씨가 기록에 나옵니다. 

공통점은 초기에는 복성 성씨였지만 

중국과 교류를 지속하면 점차 단성 성씨로 

바뀌어 간다는 점입니다. 

사택씨 => 사씨, 목라씨 =>목씨, 부여씨 =>여씨 

초기 익숙한 우리말 음차로 성씨를 만들었다가 

점차 한 글자로 축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성씨는 

현재 대부분 전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결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이죠. 

 

기존의 성씨를 가진 귀족들은 대부분 몰락했고 

살아 남은 고구려계  백제계 성씨들도 

이후 신라계 성씨로 바뀌거나 흡수됩니다 

 

때문에 현존하는 한반도 성씨의 90% 이상은 

모두 신라계에서 기원합니다 

 

오늘날의 한국 성씨의 기원을 보려면

신라의 성씨를 보아야만 합니다

 

다시 기록으로 돌아가 보면 

 

 

 

박혁거세 신화가 건국 설화로 나옵니다

알의 생김새가 박 처럼 생겨 "박"을 성씨라 했다

이후 석탈해의 경우 까치를 따라

그 성을 석씨를 했다는 이야기가 그러하죠

 

그리고 사로국 6촌장의 성씨가 있었으니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

이들 성씨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성씨들은 현재까지도 전해지는 성씨이며 

이 분들 족보를 보면 시조가 사로국이라 나옵니다. 

 

근데 사실이 아닙니다. 

 

위 기록을 전하는 서적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인데 

전부 1200년대 고려 시대에 작성 된 것이죠.

 

신라에는 원래 성씨가 없었다는 것이

금석문으로 증명이 되거든요 

 

 

진흥황 순수비를 보면 진흥왕을 따라서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비석에 나옵니다. 

근데 모두 성씨가 없이 이름만 나옵니다.

 

삼국 사기의 내용을 떠나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실제 건국 년도는 

주변 국가의 기록과 유물을 토대로 

실제 신라를 살펴보면 고구려 보다 200년 늦게 

백제 보다는 100년 늦게 건국 한 것으로 봅니다 

 

신라가 중국과의 교류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진흥왕 이후 부터 입니다. 

오직 왕인 김진흥만 성씨가 김씨라고 나오니 

신라는 성씨의 사용 자체가 상당히 늦습니다. 

 

훗날 김씨 신라왕이 삼국을 통일하자 

문무왕비에 김씨의 시조를 흉노왕 김일제라 쓰면서

나름 김씨 혈통의 기원을 높이는 작업을 했죠 

비슷한 시기 박씨와 석씨 같은 왕족들도 

자신들 가문인 성씨의 기원을 소급하여 

다양한 설화로 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에서 초기 왕족만 사용하던 성씨가 

왕족을 넘어 지배층에게도 보편화 된 것은 

더 늦어진 통일 신라 시절에 일입니다. 

 

통일 신라 시절 신라 사람들은 당나라와 교류하고

당나라에 건너가 유학하면서 성씨를 만들었습니다. 

 

사로국 6촌장의 성씨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

이는 모두 당나라 문벌 귀족들의 성씨입니다. 

 

중국에는 위진 남북조 시절부터 수백 년을 내려 온 

전통 산동 문벌 귀족 가문들이 있었습니다. 

당 태종은 이들의 귀족들의 족보를 정리했으며 

당나라 시대에는 이들 특정 성씨를 가진 것 자체로 

유서 깊고 권위 있는 집안임을 증명했습니다. 

 

통일 신라 시기 한학이 보급되고 

당나라와 교류가 긴밀하게 진행되면서 

과거 신라의 씨족 단위로 있던 혈족들도 

중국의 성씨를 모방하여 자신의 성씨를 만들었고

다시 이를 소급하여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때 어떤 방식으로 성씨가 만들어졌는지는 

해상왕으로 유명한 장보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래는 성이 없이 이름만 궁복(弓福)입니다  

여기서 궁(弓)자를 떼어서 성으로 삼았는데 

궁이 들어간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張)씨로 정했죠

그리고 복(福)자를 풀어서 보고(保皐) 라고

음차로 풀어내니 중국식 세글자 성과 이름이 됩니다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는 성씨 명명 방식이 

과거부터 있던 한국 토종 성씨 문화가 아니라

중국 문화 수입으로 변형 되었다는 것은

한국의 성씨가 일상 단어로 활용 안되는 

고유명사라는 것이 증명합니다

 

스미스라고 하면 이 넘 조상이 대장장이 출신이구나

하면서 그 자체로 유래를 알 수 있고 

호스트 뛰는 다나카의 이름자를 한자로 보면 

이 넘 조상은 밭 주변에 살았던 농부구나 

하면서 그 자체로 유래를 알 수 있죠   

하지만 한국의 성씨는 단어 만으로 그 유래를 모르죠 

단어 자체가 음차를 한자로 바꾼 OEM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련된 성씨는 지극히 당연히 왕족과 소수 귀족들

또는 중국에 유학 가서 출세한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한반도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성씨라는게 없습니다. 

 

그 신라가 망하면서 후 삼국 시대가 됩니다

 

 

 

통일 신라 시기 수도인 서라벌에서 권력에 밀려난

김씨 박씨 등등 귀족들이 지방에서 도망가 살면서

해당 지역의 토착 호족이 되기도 했고 

상인 가문으로 또는 도적떼로 일어나 지방을 점령해

지역의 호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멀리 송악 지방 촌 동네에 살던 

어디 근본도 모르는 왕건이란 인물이 

사람들을 모아 우당탕탕 한바탕 전쟁 치른 뒤 

삼한을 다시 통일하는 위업을 이루게 됩니다. 

 

고려의 건국입니다. 

 

당연하게도 당시 호족들 대부분은 성씨가 없습니다. 

당장 주인공이자 왕족인 왕건도 성씨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성씨가 없고 이름만 전해졌죠 

할아버지 이름은 작제건(황제를 만든다), 

본인은 왕건(왕을 만든다) 입니다

이름조차도 그 뜻에서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나죠 

 

왕건은 원래 그냥 이름이었습니다 

 

그냥 송악 지방에 살던 개똥이 말똥이였던 것으로

여기서 이름 뒤에 붙는 "건" 이라는 접미사는  

신라시대 관직, 직위 뒤에 붙던 말입니다. 

 

당연히 신라가 관직을 줬을리가 없고 

지역을 장악한 뒤 이름 뒤에 '건'이란 점미사를 붙여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 라고 자칭 한 것입니다. 

개성 지역을 장악한 호족 가문이란 뜻이죠  

 

그 왕건이 스스로의 성씨를 왕(王)씨라 칭하고

자기를 도와 전쟁 하며 개 고생 한 공신들에게

착하다고 토닥 토닥하며 상으로 성씨를 주었으니 

이를 '사성정책'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이들이 호족이라며 관리하던 나와바리를 

한반도의 지역의 본관이라 공식 인정했으니 

 

이를 본관 제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너님 본관이 어디임? 너님 어디 무슨 씨임?

하며 어른들이 오지랍 부리며 물어 보게 된 것이 

모두 이때 시작된 것입니다

 

전부 왕건님의 은혜 덕분인 것이죠.

 

당연하게도 여기까지도 미천한 우리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귀하신 분들 이야기입니다. 

 

이런 본관과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왕씨 왕족과 호족 귀족들 뿐입니다. 

 

 

 

고려의 왕족인 왕씨들은 모두 족내혼을 했습니다. 

왕씨 남자들은 왕씨를 이어 받지만 

왕씨 여자들은 어머니 성을 이어받았습니다 

고려 왕실은 숭고한 서해 용왕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가족들끼리 근친상간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게 대외적으로 모양이 안좋죠 

송나라가 너네는 왕씨들끼리 결혼하냐? 물으면 

왠지 폐드립 같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래서 고려의 공주들은 모두 성을 바꿨습니다. 

고려 왕실 계보도를 보면 황후와 공주들이 

황보씨, 박씨, 유씨, 정씨 다양하게 나오지만 

사실은 전부 왕씨입니다. 

 

이후 고려 성종 시절이 되면 

과거 시험을 봐야 하는데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그때 필요한게 성씨입니다.

 

그리고 또 고려는 음서제를 시행했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또는 외할아버지, 장인어른 

중에 고위직 관료가 있으면 관직이 공짜입니다. 

그때 필요한게 혈통을 증명할 계보도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씨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의 경우 피휘를 하였습니다.

새로 즉위 한  왕의 이름과 성씨가 같으면 

전국에 명령을 내려서 그 성을 바꾸라 했죠 

기준을 정해 줘서 우선 어머니 성으로 바꾸고

어머니도 피휘해야 하면 외조모 성으로 바꿉니다 

 

이를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신라말 고려 초 많은 성씨가 만들어졌지만 

고려는 성씨를 바꾸는 것을 왕족도 흔히 했고 

성씨도 사용하기 편한 몇 가지 성씨로 

점차 단순해져 가더라  

 

그리고 다시 또 강조하지만  

이 시절에는 성씨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지켜야 할 혈통이 있다는 뜻이거나 

이어가야 할 관직이 있다는 것이거나 

누구랑 결혼해야 하는지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당연히 대다수 민중들과 상관이 없죠 

 

고려시대 대부분의 민중은 자신의 존재를

그저 살고 있는 지역 명칭으로 통칭하며 

소속감과 혈통을 드러냈습니다

사는 지역이 곧 신분이던 시절입니다.

이게 고려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전 근대 시절에 지구상에 살았던  

특히 대부분의 농경 문화권의 사람들은

본인이 태어난 동네 마을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말 특별한 경우에만 마을을 떠나거나 

전쟁에 징집 되거나 노예로 납치되어 끌려 갈 뿐 

평생을 살아가며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죽죠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아는 사람이고 

그의 존재를 밝힐 때에는 고향에서는 아버지 이름 

타향에서는 출신 지역을 밝히면 그 뿐입니다 

 

삼국지에 장비가 "연인 장비다" 연나라 지방 출신이다 

조운이 "상산 조자룡이다" 상산에 사는 놈이다 하는데  

모두 자기 사는 지역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던 

전 근대 시절의 씨족사회의 흔적이고

"연신내 족제비다, 불광동 휘발유다" 하며 

지금도 통용되는 소중한 전통문화죠

 

 

 

고려는 이런 문화가  

보다 엄격하고 심화되어 적용 된 사례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군, 현으로 승격 하거나

아니면 향,소, 부곡으로 급이 떨어지는가 여부가

본인의 신분과도 연계됩니다

 

고려 3경의 하나로 개경, 서경 과 함께 동경이라 한 

신라 경주의 경우는 그 지위가 작은 수도였죠 

하지만 신라 부흥을 감히 참칭 한 역모 반란으로

지역 전체가 강등되어 수도의 지위를 박탈 당했고

그 결과 지방 도시로 전락해 모든 특권을 잃습니다. 

 

몽골 살리타를 죽인 공을 세운 용인 처인성의 경우  

원래는 하층민들이 살아가는 '부곡'이란 지역입니다. 

그때 전공으로 정식 '현;으로 승격되는 상을 받았습니다

즉 '부곡'의 주민이다 라는 뜻 나는 천민이다 가 없어진

지역 전체가 신분이 상승 되는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고려도 결국 멸망합니다.

 

(철저한 고증으로 만들어진 역사 교육 다큐멘터리 작품, 육룡이 나르샤) 

 

유아인과 신세경이 삼한갑족이라 부르는 

신라의 오랜 성씨들과 티걱 태격 하며 고생해

조선을 건국 하게 되고

 

조선은 공식적으로 '양천제'라는 신분제를 운용합니다

조선의 신분제는 매우 간단한 신분제입니다. 

 

모든 백성은 일단 양인입니다. 

왕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를 가졌죠 

하지만 죄를 짓거나 다른 이유로 천민이 된 경우 

양인에게 귀속되어 부림을 당하게 했죠 '노비' 입니다. 

양인과 천민 딱 2가지만 나눈다 그래서 양천제입니다. 

그리고 그 양인 중에 관직을 지내면 

특별히 양반으로 고려시대 귀족 대우해준다

 

이쯤 되면 고려시대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어디 무슨 씨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생겨났고 

그냥 그게 뭥미? 하며 

여전히 돌쇠 먹쇠 개똥이라 불리워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상태가 됩니다 

 

똑같은 양인인데 누구는 성씨가 있고 누구는 없습니다.

여기에 과거 시험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과서 시험을 보려면 성씨가 필수 입니다 

지역 별로 자신이 사는 지역을 본관으로 삼은 

수 많은 성씨가 생겨났고 조선 초에 토착 성씨를 조사했죠 

 

이 과거 시험이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서 변화합니다. 

 

양반은 문반과 무반 즉 관직을 지칭하는 말인데  

조선의 신분제 중에 하나인 양반 제도가 

동시대 다른 문명과 귀족과  다르게 특이한 것은 

조선 시대 양반은 고려 시대 마냥 결혼 따위로 

혈통으로 유지되는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3대가 과거에 합격 못 하거나 관직을 못 하면 

양반으로 취급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극단적인 학벌 주의에 사회의 원조로  

때문에 과거 시험을 공부한다는 것도 

조선에서는 또 다른 하나의 신분이 됩니다

 

바로 이게 조선 중기 이후 신분제의 변화와 

성씨 변화에 중요한 씨앗이 됩니다.

 

조선은 양민의 경우 조,용,조 세금  

토지세, 인력세, 지역세 3가지를 납부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걸 내야 양민인 것이고 

이것을 못 내면 천민인 것인데  

양반은 이중에 특별히 군역을 면제 받습니다. 

공부하는 선비 보고 군사 훈련 받으라 할 수 없죠 

그리고 정식으로 내가 공부하는 중입니다! 라고 

지방 관청의 호적에 "유학" 이라고 등재합니다 

 

 

조선 초창기에는 소수의 양반과 대대수의 양민들로 

나름 세수가 잘 걷히며 나라 경제가 잘 돌아갔는데

중기를 넘어가며 편법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 되자 

조선 정부는 지방에 각자 책임 지고 세금을 걷으라고 

"조세 총량제"를 시행하게 됩니다. 

근데 이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가 이뤄집니다. 

 

지역 별로 할당된 조세를 중앙 정부에 납부해야 하고

그 기준은 지역에 호적에 적힌 양인이 기준입니다.

앞서 "유학" 으로 정식 기재하면 면세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게 다른 말로 지역에서 "유학" 즉 공부하는 자로  

호적 상에 기재를 하면 그 호적은 면세라는 뜻이니 

해당 지역에 배당 되는 조세의 총량도 감소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양란을 겪으며 천민이 면천하고

공을 세워 관직에 나가며 신분제가 흔들리던 시절이라

돈을 줘 서라도 양반의 호적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새로 나타나며 넘치게 되던 때입니다

 

거기에 조선 후기 지방 조세 시스템의 변화로

지역의 수령의 경우 양반 호적 

즉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 수를 늘리면

이를 늘릴수록 지역에서 부담해야 하는 

중앙 정부 납부 조세의 압박은 경감하게 되고

책임 납부액이 경감되니 징수 달성률도 올라가 

지방관은 유능하단 평가를 받게 됩니다.

 

가짜 양반 호적이 그렇게 탄생합니다. 

 

 

 

즉 가짜 양반 호적을 만들어주면 만들수록 수령들은

지역에서는 선정을 베푸는 어지고 현명한 수령이 되고

중앙 정부에는 서류상 납부하기로 한 조세를 

매년 모두 달성해 잘 징수하는 유능한 관료로 

인사 평가를 받게 되는 기이한 상황이 만들어지죠

 

우리가 알고 있는 족보와 가문 중시도

조선 후기에 만들어지고 정착한 문화입니다. 

가짜 양반 호적은 그 자체가 

엄청난 재물과 이권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것을 증명하는 학문 '보학' 이란게 탄생하였죠  

 

보학은 족보를 공부하고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족보가 없던 성씨도 족보를 이 시기 전부 만들죠  

족보에 몇 대조에 뭘 했네 누구의 후손이네 

무슨 공파 몇 대손이네 등등 

세세히 기록하고 연구하는 풍토입니다.  

안동 권씨 족보를 제외하면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우리가 아는 족보라는 개념은 거의 대부분이 

이때 조선 후기에 탄생한 것입니다.

 

 

교과서에 배우는 대구 지역에 양반 호구 수가

50%를 넘었네 어느 지역에 60%가 양반이었네

조선 후기 신분제 혼란 시절이다 이러는게

 

서류상 성씨를 가지게 된 일반 평민이 

이 당시에 그토록 늘었다는 것이고 

그 지역의 유능하고 열정적인 지방 관리가 

그만큼 양반 호적을 많이 만들어서 

지역에 선정???을 베풀고 있었단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의 신분제는 굉장히 유연하다는 것이죠 

학벌 >>>돈, 세금 >>>>넘사벽 >>>성씨 혈통 

생각해 보면 굉장히 독특한 사회입니다. 

 

양반이라는 존재는 귀족제가 아닌지라 

혈통이 아닌 학벌로 유지되는 신분입니다.  

천민인 노비 90% 대부분이 외거노비 입니다 

사실상 소작농에 가까운 이들로 재산도 모았고 

국가 조세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조선 후기 새로운 조세 포탈의 길이 열리자

대대적으로 신분을 교체하여 

양반으로 신분을 갈아타기에 이릅니다 

 

천민 노비가 30~40%에 육박하던 사회가 

국가 조세 포탈의 새로운 탈세 방법을 제시하자 

150년 만에 천민 노비는 5% 이하로 바뀝니다  

 

영조 시절에는 아예 전문 족보 제작 업자가 

활동하며 출판사처럼 가짜 족보를 찍어서  

열심히 팔아먹었으니 하나의 산업이 됩니다.

 

조선 후기 이미 국민의 반수 이상이 

기존에 없던 유력 양반 가문의 성씨를 얻어 쓰고 

모두 기뻐하며 너도 나도 조세포탈 하던 

만인의 탈세 국가 조선이란 국가는

그나마 남아 있는 양인들에게 세금 쥐어 짜내다

삼정문란과 같은 조세부패도 경험하고

그래도 세금 모자른다 큰일 났다 하다

호포법이라 하여 양반에게도

(어차피 대부분 가짜들이자나...)

조세를 이제 징수하자 하며 개혁하지만 

그래도 국가의 재정은 부족합니다. 

노비를 양인으로 편입 하는 조선 후기 공노비 해방

개항 이후에는 사노비까지 완전 해방하게 됩니다

 

조선에서 양반 호구가 대놓고 늘어나도

호적에서 노비가 급격하게 줄어들어도 

이로 인해서 사회에 어떤 신분제 혼란도 없습니다.   

사실은 모든게 돈 문제였을 뿐입니다 

 

대신 다른 문제는 하나가 남았죠  

 

양인들도 개똥이 말똥이로 불리던 차에

천민이던 노비는 성씨가 있었을까요

그냥 마님이 쌀밥 주며 부르던 돌쇠 입니다  

 

근데 세상에 나오니

어라 양반들은 전부 성씨를 가지고 있네?

근데 살아가면서 성씨라고 듣고 아는게 

자신이 모시던 주인 나으리 성씨 뿐입니다. 

 

그리하여 모시던 주인님 성씨를 본 받아 

모두 자신의 성씨로 쓰기 하자 다짐하는 

아름다운 창성의 기풍 속에서 

마을 전체가 지역 양반 가문의 성씨를 쓰고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족보의 성을 쓰며 

너도 나도 새롭게 성씨를 가지게 되는 

한국식 창조 성씨 경제로

양인도 노비들도 전부 성씨를 가지게 됩니다  

 

그나마 내가 원래 진퉁 양반이다! 

나는 그래도 양인이었다. 

넌 주인님 성 쓴 노비 놈이다 하던 구분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너도나도 손잡고 

다 함께 징용 끌려가고 죽어 나가는 생지옥과

한국전쟁 때 너도 나도 길거리 거지가 되고  

폐허 속에서 리셋 해 전부 재편되는 과정을 거쳐 

한반도에서 일말의 신분제의 흔적도 완전 소멸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멋진 양반 성씨를 가진 

아름다운 한국의 성씨 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우여곡절 깊은 역사로

한 가지 가장 큰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으니

한국인 국민들이 사용하는 성씨의 

40%가 김씨. 이씨,, 박씨라는 것입니다. 

김씨만 1000만 특정 이씨만 700만

특정 성씨가 거의 국가 인구와 맞먹는 

놀라운 기적이 발생한 것이죠 

 

때문에 외국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성씨를 부르며 구분하고 

정말 친할 때만 이름을 부르지만

 

한국 문화에서는 이게 불가능합니다

 

어이 김사장~ 이사장 ~ 하며 부르면

지나가는 길에서도 죄다 돌아보게 됩니다. 

너도 나도 같은 성을 쓰고 사용하는  

한 가족이 되는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었죠 

 

한민족은 모두 하나다.

한국 성씨의 유래.